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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루 이야기

코로나 그리고 한국으로

by Timidiot 2020. 5. 3.

  나는 지난 4월 초 아른헴을 떠나 한국으로 귀국했다. 바로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인데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겨보고자 한다. 

  네덜란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크게 이슈가 된 건 3월 초 정도로 기억을 한다. 한국은 이미 2월부터 국가적 문제로 인식되고 관리가 된 것에 비해서 네덜란드에서는 꽤나 늦게 시작된 것이다. 유럽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탈리아로 시작되어 전 지역으로 퍼져 나갔으니 그 시기가 늦을 법도 하다. 내가 다니고 있는 아르테즈는 3월 12일에 갑자기 학교 폐쇄 공지가 나오고 13일에 짐정리에 들어갔다. 다른 학교는 더 이른 시기에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알고 있고 아르테즈는 조금 늦은 편에 속한다. 이즈음에는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아인트호벤 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바이러스가 확산되었고, 그나마 아른헴은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위 언급한 대도시의 경우에는 생필품이나 식료품 사재기가 있다고 하는데, 그에 비해 작은 도시인 아른헴은 형편이 나은 축에 속했다.

  이 즈음에는 페이스 북의 낮은땅높은꿈 에서 심각한 인종차별 이야기 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언어나 행동으로 비아냥이나 야유 욕설등의 행위는 원래도 있었지만 빈도와 정도가 심해졌고, 건물 벽에 낙서, 폭행사건 등 수위와 정도가 점점 심해지는 일이 종종 들려왔다. 여기에 논란을 만든 사건 중 하나는 Radio 10 방송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걸리기 싫으면 중국집도 가지말라는 내용을 담은 노래가 송출 된 것이다. 그리고 더 가관인 것은 댓글이나 일부 사람들의 인식이 농담을 두고 과민반응을 한다는 식의 반응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겪은 코로나 관련 인종차별 에피소드도 있는데, 수업교보재가 택배로 왔는데 내가 받지 못해서 택배가 맡겨져 있는 Primera 에 찾아갔다. 그런데 일단 거기에서 일하는 네덜란드 중년여성분이 몹시 신경질을 내면서 나에게 사회적 거리를 지켜서 줄을 서라고 윽박질렀다. 어디에 서야 하는 지도 모르고 줄도 애매한 상황에서 그저 엄포를 놓는 것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내 앞에 와서 줄 서있던 다른 남성도 내게 코로나~를 말하며 비아냥 거리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참고 넘어가는데 택배를 건네 준 다른 직원의 표정 또한 가관이었다. 택배번호가 적히 안내장을 건네 주는데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리는 표정으로 받으면서 비아냥 거린다. 오랫동안 타국에서 혼자 있는데다가 긴장감과 일종의 피해의식이 있어서 더 그런 것이었을 수 있지만, 그때 느낀 그 굴욕감은 정말 최악이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네덜란드 정부는 사람들이 모이는 시설의 셧다운 등의 조치를 취한다. 여기에서 네덜란드 정부의 방침들 중에 한국학생들과 얘기하면서 회자 되었던 것은 크게 두가지이다.

1. 마스크를 안끼는 네덜란드 사람들
   네덜란드 정부에서도 마스크 부족을 이야기 하면서 마스크가 큰 효과가 없고 손씻기와 거리두기를 강조했다. 그래서 그런지 네덜란드 사람들은 마스크를 끼지 않고 거리를 다니고 있었다. 한국에서 마스크를 끼지 않는 것이 단순히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에게 확산시키지 않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면, 네덜란드에서는 감염 증상이 있는 상황에서 확산을 막기 위해 쓰는 것이라는 의미를 더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마스크를 쓰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고 피하는 상황이 발생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시아 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나 시선이 더 곱지 않아진 상황에서 마스크 마저도 끼기 어려운 조건이 만들어져 버린 것이다. 이런 모습에서 더 불안함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2. 집단 면역 이라구요??
  네덜란드 정부에서 발표하면서 기본적은 대응전략이 집단면역이라고 했다. 집단면역은 전체 인구의 60%(?)정도의 인구가 항체를 가지면 전염병의 확산이 멈추거나 느려진다는 개념이라고 한다. 그 말인 즉슨, 그 많은 사람들이 항체를 갖기 위해 바이러스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 일 것이다. 그래서 내 주변에 한국 학생들이 귀국을 결정하는데 이 집단면역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항체를 가질 때까지 바이러스 확산을 통제하겠다는 이야기 인데, 이것은 네덜란드의 의료 시스템이나 대응상황을 봤을 때 불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학교는 셧다운 되고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 된 상황에서, 내 주변의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귀국길에 올랐다. 나는 비교적 늦게 귀국을 한 경우 였는데, 한국으로 귀국을 결심하기 까지 많은 생각들이 있었다. 먼저 온라인 수업이라고 할 지라도 작업을 계속 해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과정이나 재료를 챙기고 작업환경을 바꾸는게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 네덜란드로 돌아오는 것이 비행기편이 없거나 입국 금지 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한국의 확진자 수가 진정추세가 아니었기 때문에 역시 계속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연 학교가 언제 다시 정상화 될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최초에 4월 1일까지 셧다운 된다는 상황에서 계속 조금씩 그 기간이 연장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확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마음 한켠으로는 내가 해외에서 자리잡고 살아가려고 결심을 한거라면 이런 전염병이 돌고 있는 속에서도 네덜란드에 남아서 이 환경을 겪고 이겨내야 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는 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가족들의 걱정이었다. 아내와 가족들과 친구들 지인들이 나의 상황을 걱정해주고 안부를 물어왔다. 특히 아내가 혹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기회를 놓칠 까봐 많이 걱정했다. 그리고 학교도 셧다운이 점차 장기화 될 것으로 보이기도 했고, 나도 무엇보다 한국에서 이 시기를 안전하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학교 셧다운 이후, 혼자 집에서만 보내는 시간이 지속되면서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어 지고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사러 나가도 이방인으로써 인종차별이나 더 차가워진 시선들을 느끼면서 긴장하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긴장감이 더 심해져서 몸과 마음을 경직 되게 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나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 행을 결심하게 된다. 내가 비행기에 탑승한 4월 3일 전 후로 비행기 운항도 많이 불안해지고 네덜란드는 상황이 더 심각해지며 한국은 점차 진정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돌아온 시기도 적절한 시기에 늦지 않게 귀국한 것 같다.

  귀국을 준비할 때, 네덜란드의 코로나가 연말까지 지속되고 학교가 개강하게 된다면 나는 과연 네덜란드로 돌아와야 하는가 라는 가정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유학생활을 중단하거나 휴학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옵션이 생겨버린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긴 기간을 두고 차츰 어떤 증후나 예고와 함께 찾아온 것이 아니라, 불과 2~3주 사이에 급변한 상황 속에서 하루이틀 사이에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이 가정은 내가 지내고 있던 이 유학 생활이 졸업까지 계속 될 것이라는 막연한 예상이 정말 언제든지 어떤 이유에서든 불시에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해주었다. 사실 부모님의 안정적인 지원을 받고 하는 유학이 아니라, 아내의 소득과 그동안의 저금으로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하게 진행하는 유학 생활이다. 그래서 언제든 경제적이든 결혼생활에서든 무엇이든 문제가 발생하면 중단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불안한 유학생활이라는 것은 알고 시작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체감을 한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실제로 귀국을 준비하면서 방에 있던 모든 짐들을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가정하고 정리했다. 불과 이틀 삼일 사이에 예상치 못하게, 혹시 몰라 쌓아둔 것들을 다 버리고 혼자 먹으려고 장봐온 것들을 억지로 처리하고, 가져갈 것과 남길 것과 다른 사람에게 줄 것과, 팔 것들을 분류하고 정리 하는 일을 해버린 것이다. 당분간은 아무 변화나 문제가 없이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생활을 단박에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드는 감정을 참으로 복잡한 것이었다. 이 생활이 끝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후회, 두고가는 물건들에 대한 아쉬움, 버리는 것들에 대한 시원섭섭함, 해야했던 것과 하지 못한 것들을 남겨두는 마음 등 매우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휘젓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한 심경 속에서 나는 그저 아내에게 집중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기에 다 놓는 마음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이 후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할지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행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그 때 느꼈던 그 감정과 생각들을 잊지 않고 싶어서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귀국을 준비하는 시기에 들었던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게 있었다.

  '해로운 희망을 다 끊고서 예쁘게 시들어가고 싶어 너와'
  시듦을 생각할 정도로 희망을 끊은 것 같지는 않지만, 해로운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겠다. 이 시기가 나에게 또 다른 각성과 전환의 시기가 되어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이런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나는 한국에 와있고 자가격리를 잘 마치고, 2학기 중간고사를 동영상을 찍어 제출 했으며 수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